

으흠. 여진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다 숨 훅 내쉬기를 반복한다. 그녀 감각은 온통 왼편에서 이따금씩 스치는 온기에 집중되어 있다. 무감하게 탁탁 타자치던 손이 멈춘 틈을 놓치지 않는다. 여덟 명이 모인 사무실 안은 조용히 불타오르는 중. 눈꺼풀은 고정, 검은자만 휘릭 굴리는 고도의 기술을 발휘해 사위를 염탐하면 그 다음 쓸 말을 고민하는 듯 입 언저리를 매만지는 시목이 포착된다. 여진의 눈길은 뼈마디 불거진 흰 손을 따라 절로 내려간다. 리듬 따라 키보드 두드리며 근육을 조종하고 동작을 비트는 일련의 손놀림. ...내 그림보다 더 예술이네. 몰래 시작한 관찰이라는 것도 잊은 채 어느덧 턱까지 괴고 제 대각선의 남자를 바라본다.
(컷.) 지금까지의 상황만 살펴보면 평범한 업무 현장 속에서 남다른 눈빛을 보내는 한 형사, 외엔 특별할 것도 없어 뵌다. 그렇다면 여진이 저렇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한창 탐닉하던 눈동자를 세모꼴로 변신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선을 느끼자마자 시목이 목석같던 등을 더욱 굳히다 갑자기 겉옷을 챙겨 나간다. 그렇다. 두 번째 특임이 시작된 이후 저 남자는 여진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 이건 두 말 할 것도 없는 형사의 직감이라고. 여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감이 여실없이 맞아 들었음을 반추한다. 그냥 오랜만에 만나니까 쑥스러워서? 남해 통영지청에서 십 개월 근무하고 오더니 바닷바람이 황 검사 그나마 남아있던 붙임성까지 모조리 앗아갔나 의심해 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특임 첫째 날 다시 만난 실무관과 계장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잔잔한 미소까지 띄우는 것을 목격한 직후 이 가설은 통째 증발당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지금, 명백하고 또 절실하게 한 경감를 피해다니는 황 검사 건에 대하여. 사건 경위를 밝히고 어둔 내막까지(있다면) 샅샅이 파헤치기 위해 여진은 따로 깜찍한 수사를 시작했다.
ROMANTIC CRIMINAL
-사랑은 있으나 눈치는 없는
그 누군가에 대하여-
단서 1 : 검사님의 사건 수첩
특임팀 모두가 자리를 비울 때를 노려야 했다. 여진은 오랜만에 모여서 먹는 점심이니 다 같이 가자는 건의 외침을 뒤로 한 채 화장실에 잠복했다. 뒤이어 살금살금 다시 들어가 시목의 책상을 확인했더니 아까 봐 뒀던 검은 가죽 수첩 하나가 정갈히 놓여 있다. 분명 이번 비리 건 증거 관련해서 자문 서류 준비해달라고 부탁하고 나갔으니 여진은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하는 중이다. 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종잇장을 들어 올리자 정갈하지만 어딘가 딴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 흘려 쓴 것 같은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나 그다운 흔적으로 가득 찬 책장을 넘길 때마다 픽 하고 웃음이 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저 사실을 기록해놓은 수첩일 뿐인데 여진은 어느새 극비 압수수색 본연의 목적도 까먹은 채 내용물을 구경한다. 날짜별, 시간 순으로 정리해놓은 줄글 군데군데 알 수 없는 모양새로 낙서된 자국을 바라보고 있을 때 별안간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때 이른 위험에 처한 여진이 급히 사무실 안쪽에 딸린 작은 방으로 몸을 숨기자마자 문이 찰칵, 열렸다.
"할 얘기가 뭔데?"
한 명이 아니고,
"그... 아직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두 명이다.
여진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며 쭈그려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목과, 이번에 새로이 특검에 합류하게 된 신입 검사 J. 다들 점심 먹으러 간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왜 둘만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사분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낮은 톤의 대화가 깔린다. 벽을 사이에 둔 터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이 웅얼대는 정도로만 들리지만, 여진은 시목의 응, 응 하는 목소리가 어딘가 다른 기류를 띄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귀를 좀 더 가까이 붙이려 다가 앉자 심지어 웃음 소리가 들린다. 뭐야, 이거 무슨 상황인데. 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래. 그럼 그건 최대한 빨리 알아봐주고."
여진은 재빨리 수첩을 내려다 본다. 두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보고 있던 페이지 사이에 끼워진 엄지 손가락은, 바로 J의 이름과 그 언저리에 두어번 겹쳐진 빨간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있다.
단서2 : 그의 집 비밀번호(????)
결국 첫 번째 시도는 가중된 의혹만 남긴 채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여진은 뒤늦은 점심 대용으로 소보루빵을 깨작이며 오후 업무에 열중인 용의자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고 보니 J검사님이 온 다음부터 사무실 분위기도 뭔가 말랑해진 것 같고. 콧김을 훅 내뿜자 바람에 날린 부스러기가 옆자리 건의 서류로 조신히 안착한다. 이곳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건 93% 이상이 비고의적인 황시목 검사의 컨디션과 야근 유무라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론을 확장시키는 동안 시계는 빠르게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전투적으로 비닐에 남은 쪼가리를 싹싹 긁어모아 씹는 여진의 뒤로 수고하셨습니다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스쳐 지나간다.
"검사님."
아니 저 사람은 피할 거면 좀 제대로 하든가. 여진은 이번에도 서류 검토하던 골무 낀 손이 잘게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황시목 검사님. 저 좀 보시죠?"
음절 하나하나 꾹꾹 눌러 뱉자 그동안 같이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었던 얼굴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말간 얼굴에 잠시 멍해 한 대 맞은 표정을 하고 있자니 대답이 날아들어 온다.
"고생하셨습니다. 퇴근, 하시죠."
여진은 착착 서류더미를 정리하고 의자를 집어넣는 시목을 눈썹만 치켜떴다. 퇴근시켜달라고 떼 쓰려던 게 아닌데 의혹에 오해까지 아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피 키우게 생겼다. 여진은 여즉 골무 끼운 시목의 하얀 손을 보다가 대뜸 물었다. 사실 명령에 더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그 골무 벗고
저랑 같이 퇴근할까요.
말없이 저를 쳐다보다가 고개 끄덕이는 시목 뒤에 우두커니 선 화이트보드 배경이, 운전석 핸들로 바뀐 지는 그러니까 얼마 지나지 않았다. 여진은 여전히 고장난 것 같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괜찮으십니까? 다 왔는데요. 옆자리 남자는 꿋꿋이 앞만 보며 물어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벌써 여진의 옥탑방 앞이다. 검사님 집은 어떡하고 왜 굳이 여기까지 바래다 줬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남해에서 돌아온 그가 여진의 빌라 바로 옆 또다른 옥탑방을 거처로 구했다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는 바여서다. 생각하니 또 열이 확 솟구친다. 옆집에 살면서 창문 내리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도 서로를 부를 수 있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내외하는 이유가 무어인가.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물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왠지 요즈음의 그 앞에만 가면 저도 함께 굳어버리는 여진이다. 일종의 반항심 비슷한 것도 여진을 말보다 행동이 앞서도록 만드는 사유 중 하나라고. 퉁명스레 차에서 내린 여진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시목의 뒤꽁무니에 착 붙는다. 시목은 크로스백 끈을 꽉 붙잡고 입은 웅 다문 채 졸졸 따라오는 여진을 곁눈질하더니 하효 한숨만 한 번 작게 내쉴 뿐이다.
터벅터벅 올라가는 두 쌍의 그림자가 얽힌다. 현관 앞에 우뚝 멈춰서자 시목은 굽은 등을 더욱 움츠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진은 저승사자마냥 뒤를 지키고 있다.
"저... 비밀번호도 보실 겁니까."
목석같이 빳빳한 분위기에 결국 여진이 한 발 물러서줬다. 쌍심지 켜고 노려보는 시선에 아랑곳 않고 네 자리 수 누르는 남자의 붉어진 목덜미를 보고야 만다. 잠깐, 지금 이 반응 뭐야? 뒤늦게 키패드를 향해 돌진했으나 이미 문은 바람보다 더 빠르게 열리고 닫힌 후다. 황망한 여진의 얼굴 위로 가로등 불빛이 드리운다.
"????"
단서 3 : 카모마일 티
며칠 뒤 한 형사는 꽤나 그럴 법한 가설을 세운다. 첫째, 황 검사는 J 검사와 따로 벌이는 일이 있다. 둘째, 황 검사는 한 형사를 단순히 피하는 걸 넘어 무언가 숨기고 싶어 한다. 이 두 명제를 합치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보자 그간의 의문이 조금씩 풀리는 것도 같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기류를.
특검이라는 중대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사내연애를 병행하는 게 다소간 쉽지는 않은 일이라는 걸 안다. 이목이 쏠리는 게 싫었겠지. 어쩌면 사적인 사안으로 관심이 분산되는 게 싫었을지도. 여진은 입맛을 쩝 다신다. 그래도 나한텐... 조금은 들켜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름 오밤중에 통화도 하고 집에도 드나들던 사인데. 생각하다가 별안간 퍽퍽 이마를 쳐 몇 사람의 눈길을 받기도 한다. 내가 미쳤지, 이미 임자 있는 사람한테 무슨 말도 안 되는. 시목이 연애상담조차 받으러 오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저 둘의 관계 진전이 그만큼 원만하다는 의미도 된다. 하지만 여진은 제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유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저 10개월 전 어느 날 어느 시간대의 일을 돌이켜 보느라.
둘은, 딱 한 번 스킨십 비스무리한 행위를 한 적이 있다.
발단 전개 그런 개연성은 개나 던져줬던 날이었다. 당시는 이유도, 정체도 몰랐던 괴한이 시목의 집에 무단침입했던 밤. 수사를 위해 처음 서부지검 앞 래미안 802호에 발 디딘 여진이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 회빛깔 황량한 거실 바닥과 가구들이, 갈기갈기 찢겨 서재에 목 매달린 양복이, 아무렇지 않은 듯 건과 저를 불러 거처를 수색하면서도 이따금씩 하던 말을 멈추고 찌푸리는 미간이. 대강의 현장 조치를 끝내고 밤 거리로 나와서도 자꾸만 눈에 밟혔다. 추위에 빨개진 채 타닥타닥 검색하던 손이 곧 따끈한 테이크아웃 잔 두 개를 들고 돌아왔을 때, 안심하는 듯한 낯빛에 저도 모르게 이끌려 두 번째로 발 들였던 시각. 여진은 시목과 도란도란 사건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소파 위로 몸을 늘였다. 이런 집에서 잠이 와요? 밥은 먹고? 사막같은 풍경 휘휘 둘러보며 눈썹 치켜뜨는 여진에게 시목은 놀랍게도 조금 웃어 보였다. 사실은 한쪽 입꼬리만 0.5도 각도로 올린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그에게 익숙해진 여진은 어느 정도 시그널을 해석할 수 있었고. 더 말 붙일 것도 없이 함께 소파에 엎어지기도 했었지. 물론 작정하고 덤빈 건 결코 아니다. 여진이 차를 조금 쏟는 바람에 시목이 휴지를 들고 다가왔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는 게 그날 밤의 진상이었다. 하지만 때로 감각은 이성이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랜 기억으로 머문다. 입술과 입술이 1cm 간격으로 닿을 뻔했던 찰나 그 공백을 감돌았던 카모마일의 사과 향과 바디워시, 그리고 희미한 복숭아 맛 립밤의 체취는 절대 휘발되지 않을 기억.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헛기침을 해대며 마저 자리를 멀끔히 치웠지만, 여진은 시목이 남해로 좌천되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종종 카모마일을 사 들고 옥탑방 평상에 자리 잡았더랬다. 그 집 소파 감촉은 어땠었지, 떠올리며 딱딱한 나무 판자에 드러누워 이것저것 생각하던 시간들.
깍지 낀 손등에 턱을 얹고 회상하던 여진의 후각을 익숙한 무언가가 몹시 자극한다. 본능 따라 황급히 돌아가는 시선의 끝에 걸린 건 적당히 김 올라오는 찻잔과 J.
"좀 드시면서 하세요."
오늘 점심 안 드셨잖아요. 걱정하는 듯 가볍게 핀잔주는 말투와 함께 카모마일 티가 시목의 앞에 들이밀어진다. 컴퓨터 화면에 얼굴을 고정한 채 응, 고마워, 대답하는 저 무심한 검사. 뒤이어 J는 활기찬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회식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오후에 있을 사건 브리핑을 끝내고 모이기로 정해졌을 즈음까지도 한 사람의 눈길은 탁상 위 머그컵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
...
3. 카모마일 티
그리고 그날 밤
회식 자리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다(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판단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예상보다 쉽사리 진척되는 사건 덕에 특검팀 사람들 모두 마음 놓고 붓고 마셨다. 여진은 반쯤 풀린 눈으로 아까부터 자꾸 주머니 속 무언가를 깨작깨작 매만지는 시목을 흘긴다. 입술 쭉 내밀고 푸우 한숨 쉬다 밀려오는 알콜 냄새에 헛구역질 하면서.
"아이구, 울 한 경감님 오늘 많이 취하셨네."
이 정도면 얼른 들어가서 씻고 주무셔야 하는 거 아녜요? 멀리서 계장과 실무관의 대화가 아른거린다. 만취한 여진을 데려다 주는 수순은 자연스레 황 검사에게로 돌아갔다. 옆집 사신다면서요? 시목의 팔을 붙잡고 끌어 와 부축을 도와주는 J 덕에 여진은 괜히 얼굴을 붉혔다. 거절도 못하고 결국 모두의 손에 이끌려 시목의 차에 탔을 때도, 몽롱한 정신에 누군가에게 안겼던 오른팔의 감각만큼은 생경히 남아 있었다. 이로써 여진이 시목과 동반퇴근 하는 건 두 번째. 전번과 같은 가로등 아래로 차를 주차시킬 때까지, 여진은 꼼짝않고 창밖만 바라보기로 다짐한다. 술 냄새 폴폴 풍기며 내린 후에도 절대 입 꾹 다물고 제 집으로 돌진하겠다고.
"경감님. 잠시만 계십시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퍼뜩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반대쪽 대문 앞에 서 있는 거다. 시목은 비틀거리는 여진을 벽에 기대 놓고 비밀번호를 누른다. 이때다 놓칠 새라 눈 가늘게 뜨며 손가락을 따라가면, 샵 육이팔일 별표. 좀 익숙한 조합인데...? 생각한 다음엔 이미 집 안에 두 다리 놓은 후. 에엥 검사님 지금 이거 뭐하자는 거야? 당황스런 마음에 줄곧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던 목소리까지 튀어나온다.
"차 세우자마자 제 집으로 뛰어 올라가시던데요. 취하신 거 좀 깨면 댁으로 데려다 드리죠."
상체 숙여 여진의 신발을 벗겨 주고 다시 올라온 얼굴에 이유 모를 비장함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거..."
두툼한 손이 내민 건 단정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 땡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자 기다렸다는 듯 변명을 시작한다. 다른 팀원들께는 이미 다 나눠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남해에서 턴백한 기념선물, 뭐 이런 거란다. 확실히 사회성을 많이 배워오긴 했는데. 설마 지금까지 저 피해 다녔던 게 이것 때문이에요?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쏘아보는 여진의 앞에서 시목은 끝없이 망설인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셨습니다.
그게 끝? 생각하면서도 여진의 손은 저절로 올라가 허리께까지 내려온 제 긴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설마 황 검사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새로이 등장한 가설에 함박웃음 지으며 건네받은 리본 꾸러미를 풀자 정육면체 유리에 담긴 헤어 퍼퓸이 나온다. 이건 또 어떻게 알고 샀대.
아,
"J 검사가 선물 고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해서요. 같이 가서-“
뒷말 따위 잇게 놔두지 않는다. 여진은 지난날의 정체 모를 감정과 성급함을 떠올리며 활짝 웃는다. 그랬구나. 이 사람 나름의 표현이었을 터다. 해묵은 앙금이 풀리자 남은 건 그동안 구석에 처박힌 채 애써 외면 당해왔던 딱 한 가지 감각 뿐. 둘은 약 1년 전 어느 밤처럼 시목이 곧게 개어 둔 이부자리 위로 함께 넘어진다. 그대로 등을 대고 누운 시목이, 해사하게 미소 짓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동안 서로 정말 많이 달라져서 돌아왔지만, 어떤 마음만큼은 결코 변치 않았다고. 오랜만에 마주한 복숭아 향에 더해지는 라벤더 샴푸 향기를 맡으며.
단서4 : 황시목 1983.06.02생,
한여진 1988.08.11생.

